
원죄를 규명하는 일은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의 억울함과 감정의 균열을 끝내 외면해 버릴 때, 정의는 오히려 더 큰 비극을 낳는다.
이노센스: 원죄의 변호사는 바로 그 지점을 집요하게 보여준다.
문제의 변호사는 법적으로는 치밀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당사자의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질문에는 다가가지 않는다.
절차는 완벽하지만 맥락은 비어 있고, 논리는 단단하지만 인간은 빠져 있다.
그래서 보는 사람은 답답해질 수밖에 없다.
설명되지 못한 억울함은 사라지지 않고, 결국 다른 형태의 폭력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 원죄 속에 묻힌 억울함을 제대로 들여다봤다면
그 인물은 연쇄살인마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건 단순한 가정이 아니라, 작품이 던지는 가장 잔인한 질문이다.
“법이 죄를 밝혀도, 인간은 과연 구원받는가.”
겉으로 보면 그는 차갑고 강인한 인물처럼 보인다.
비난을 감수하며 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힘,
그 자체만 놓고 보면 결코 약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그 강인함은 타인의 고통을 감당하는 방향이 아니라,
차단하고 외면하는 방향으로만 작동한다.
그는 내면적으로 성숙한 인물이 아니다.
불안하고 미성숙한 확신에 의존하며,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그 믿음을 흔드는 현실과 감정, 사람의 고통은 의도적으로 배제한다.
그래서 그는 원칙을 말하지만 그것은 냉철함이 아니라 선택적 맹목에 가깝고,
그 결과 사건의 맥락을 계속 놓친다.
아이 유괴 상황에서도 재판을 강행하려 한 장면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법을 지킨 선택이 아니라,
인간을 법 뒤에 숨겨버린 순간이었다.
그 결정의 무게는 고스란히 주변 사람들에게 전가되고,
피해자와 가족, 동료들만 점점 소진된다.
결국 이 작품이 묻는 질문은 명확하다.
법적으로 옳은 선택이 항상 인간적으로도 옳은가.
원죄를 밝혀내는 일과 억울함을 들어주는 일은 왜 이렇게 멀어졌는가.
그리고 고통을 외면한 정의는, 또 다른 폭력을 낳지 않는가.
그래서 연쇄살인이라는 극단은 개인의 악이라기보다
방치된 억울함과 오만한 확신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처럼 보인다.
이 드라마가 오래 남는 이유는
누군가의 악을 고발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얼마나 자주 ‘역할’ 뒤에 숨어 인간을 놓치는지를
끝까지 묻고 있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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